17卷9冊 : 四周雙邊 半郭 20.4 x15.7 cm, 有界, 10行20字 註雙行, 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 ; 31.2 x 20.5 cm.
조선 중기의 학자인 조술도의 시문집이다. 할아버지는 조덕린이고, 아버지는 조희당(趙喜堂) 이며, 어머니는 장수 황씨로 황종만(黃鍾萬)의 딸이다. 청년기까지는 과거 공부에 종사했으나 1759(영조 35)년 동생 조진도(趙進道)가 문과에 합격하고도 조덕린의 손자라는 이유로 삭과 (削科)되자 과거를 단념하고 성리서를 탐독하였다. 향인들이 그를 월과(月課)의 학정(學正)으로 추대하자 상벌을 엄격하게 행하는 한편, 여씨향약(呂氏鄕約)에 준해 생도들을 가르쳤다.1765(영조 41)년 이상정․김낙행(金樂行)의 문하에 입문하고, 김종덕․류장원․이종수(李宗洙)․ 정종로와 학문을 토론하였다. 1776년에는월록서당(月麓書堂)을 지어 후학들을 지도하고 ‘만곡(晩谷)’으로 자호하였다. 조술도는 조부 조덕린의 신원운동을 위해 수차례 서울을 왕래 했으며, 당시남인의 영수 채제공과도 자주 접촉하였다. 그 결과 1789(정조 13)년에는 신원운 동이 성사되고 채제공과의 관계도 더욱 밀접해졌다. 그는유학의 가르침에 충실해 서학(西 學)․노장(老莊)에 대해서는 매우 엄정한 입장을 취했으며, 일생 사서(四書)․『심경(心經)』․『근사 록(近思錄)』․주자서(朱子書)를 애독하였다. 만년에는 도선서원 유생들을 위해 「향음주고정의식 (鄕飮酒攷定儀式)」을 제정하고, 『주서강록간보(朱書講錄刊補)』를 교열하였다. 경세론에도조예 가 있어 영양현감을 대신해 지은 9조항의 권농책(勸農策)은 유명하다.
이 문집은 순조연간에간행된 듯하며, 책머리에 정종로의 서문이 있다. 권1․2에 시 267 수, 권3∼7에 서(書) 167편, 권8∼10에잡저 22편, 서(序) 13편, 기(記) 8편, 발(跋) 16편, 잠(箴) 2편, 명(銘) 1편, 권11에 찬(贊) 2편, 상량문 3편, 애사 11편, 축문 10편, 권12에 제문 33편, 묘표 3편, 권13∼17에 묘갈 15편, 묘지 10편, 행장 9편, 행록(行錄) 21편, 유사 8편, 전(傳) 2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서(書)에는 『중용』․『대학』에 관한내용이 많다.
이기(理氣)․심성(心性)․예설(禮說) 등에 관한 논술과 함양(涵養)․거경(居敬)에 대한 글도 있다. 이상정에답한 「답대산선생(答大山先生)」은 능지(能智)․능각(能覺)은 심인데, 전자는 기(氣)에 주(主)되어 동(動)에 속하고, 후자는이(理)에 주되어 정(靜)에 속한다는 내용이다.
「여윤황림(與尹篁林)」에서는생수(生數)인 1∼4는사단(四端)이고, 성수(成數)인 6∼9는 칠정(七情)인데, 그이유는 하늘이 하나로부터 생수를 이루고 땅이 여섯으로부터 성수를 이루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였다. 「여정사앙(與鄭士仰)」 별지(別紙)에서는 도학(道學)은 학(學)을 주장하 고, 도통(道統)은 행(行)을 주장하는 것이라고 사단칠정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고 있다. 잡저가운데 「운교문답(雲橋問答)」은 유(儒)․불(佛)․도(道) 3교의 사상과 학설을 인용하고 비교해 천주학(天主學)을 비판한 글이다. 「유석분합변(儒釋分合辨)」은 유학을 숭상하고 불학 (佛學)을 비판하는 논술이다. 「재거수록(齋居隨錄)」은 인심(人心)은 선과 악이 출입하며, 이(理) 와 기(氣)가 합쳐진것이라고 보고, 이(理)는유무(有無)를 논할 수 없다는 내용이다.
「향음주의고(鄕飮酒儀攷)」는 1799(정조 23)년 안동 도산서원의 향음주례에 관한 의식(儀式)을 질정한 것이다. 「농서연의(農書演義)」는 농업과 여러 농사 관계의 서적에서 농정제도에 관한 것을뽑아 9개 항목으로 나누어 설명한 것이다.